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란 혁명 (문단 편집) == 전개 == 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계기는 [[1978년]] [[8월 20일]]에 아바단에서 일어난 [[https://en.wikipedia.org/wiki/Cinema_Rex_fire|렉스 극장 화재사건]]이었다. 정부에서는 이슬람주의자의 방화라고 주장했지만 반정부 측에서는 사바크의 [[방화]]라고 주장했고, 범인의 정체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이미 반왕정 시위가 거셌던 정세에 [[기름]]을 끼얹은 사건이 되었다. 전국적인 시위가 이어지는 가운데 [[9월 8일]]에는 [[테헤란]] 동부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군경은 유혈 진압으로 대응했으며 이 사건은 검은 [[금요일]]로 불린다. [[파일:_methode_sundaytimes_prod_web_bin_e41e7a34-638b-11ea-8022-13d7c8930f6d.jpg]] 팔라비 2세 이란 황제의 [[사진]]에 [[불]]을 지르며 규탄 [[구호]]를 외치는 이란 시민들 혁명이 격화되자 당시 나자프에서 [[파리(프랑스)|파리]]로 옮긴 호메이니는 육성 [[카세트 테이프]]를 통해 이슬람주의자들의 결집을 촉구했고 하산 하비비(Hassan Ebrahim Habibi), [[아볼하산 바니사드르]] (Abol Hassan Bani Sadr), 사데크 코틉자데(Sadeq Qothbzadeh), 이브라힘 야즈디(Ebrahim Yazdi) 등의 해외 반왕정 인사들을 규합했다. 이들의 혁명 이후 행보는 제각각이었지만 혁명 때는 같은 편이었다. * 하비비는 혁명 후에 이란에 남았고 [[법무부 장관]], [[부통령]]을 맡기도 했다. * 바니 사드르는 [[이란 대통령]]으로 취임했으나 노선 차이로 호메이니와[* 부연 설명을 하자면 당시 이란은 크게 극좌 성향의 투데당, 좌익 성향의 인민 무자헤딘, 중도파 성향의 이란 자유 운동 등과 바니사드르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있었고, 마지막으로 호메이니의 이슬람공화당과 전투적 성직자회 같은 이슬람주의자들이 있었다. 이중 좌익들과 중도파들이 숙청당하는 것과 반미 정책에 반발한 것이 혁명 임시 정부 총리 메흐디 바르자간과 초대 대통령 바니사드르였다. 결과론적으로 중도파들이 이슬람주의자들과 성직자들한테 밀렸다. 이후 바르자간과 바니사드르 모두 망명했다.] 노선 차이와 대립 끝에 실각했고 재차 프랑스로 망명했다. * 야즈디는 과도정부에 참여했지만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미대사관 인질사건]] 때 퇴임 후 이슬람 정부에 반대하며 재야 인사로 활동했다. * 코틉자데는 혁명 이후인 [[1982년]]에 호메이니 암살 음모사건에 연루되어 사형당했다. 그 동안 이란에서는 팔라비 2세가 골람레자 아자리 [[장군]]을 [[수상]]에 임명하여 [[군대]], [[경찰]]의 힘으로 시위를 통제하려 했고, 불만이 터진 국민들을 달래기 위해 민주적 [[다당제]]에 입각한 새 총선 실시와 [[국왕]]의 [[권력]]을 제한하는 [[입헌군주제]]로의 [[개헌]],[* 무려 내년인 1979년에 총선과 신헌법 개헌을 시행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언론]] 자유 허용, 정치범 사면, 세금 감면, 사바크 해체,[* 이건 결국 이란 제국의 마지막 총리였던 바크티아르의 지시에 의해 해산됐다.] 국내 실업자들에 대한 일자리 창출 등 여러 개혁안들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미 민심의 이반으로 불만이 터질때로 터진 이란 국민들과 왕당파를 제외한 이슬람주의 파와 공화주의 파 등 이란 내 각 정파 세력들은 국왕의 개혁안에 찬성하지 않았고, 오히려 팔라비 2세 국왕의 즉각 퇴진과 왕정폐지를 요구했다. 거기에 당시 이란군 내부에서도 육군과 공군, 해군 등을 막론하고 팔라비 왕조에 반기를 들며 반정부 시위에 대한 진압을 거부하거나 혁명을 지지하는 장교와 병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더욱이 이란의 우방국인 미국과 유럽 등 서방권 국가들에서도 팔라비의 [[인기]]가 떨어지고, 1979년 1월 과달루프 선언으로 미국, 영국, 서독, 프랑스 등 서방 국가들이 이란 사태에 대한 불개입을 선언하여 팔라비를 버리기로 결정하면서 팔라비 왕조는 안팎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한편 혁명이 격화되어가던 1978년 말에 팔라비 2세 이란 황제에게는 자칫 자신이 이란 국내에 잔류하여 살아있는 상태에서 몰락한다면 분노한 이란 민중들과 당시 반왕정 혁명을 주도한 혁명 지도부 세력들에 의해 본인과 그 일가족들이 사형을 당하거나 조리돌림과 집단린치로 멸시를 당하고 맞아죽던지, 또는 인간의 탈을 쓴 짐승으로 간주되어 테헤란 에람공원 동물원의 동물 우리에 갖혀 전시되고 사육당하는 인간 이하 존재의 대접을 받거나, 굷주린 사자나 곰 같은 동물원내 맹수의 먹이로 던져져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걱정들이 엄습해오기 시작했다.[* 팔라비 왕조의 급진적이고 불균형적인 근대화 정책의 실패와 사바크 등 비밀 경찰들을 앞세워 반대 세력들을 억압해오며 펼친 전제군주제에 가까운 통치로 인해 당시 이란 민중들은 팔라비 왕조에 대한 분노와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이란 민중들의 지지에 편승하여 정권을 잡았던 호메이니 등 이란 혁명 당시의 혁명 지도부들과 이란 민중이 혁명으로 팔라비 왕조가 무너지자 옛 팔라비 왕정의 치하에서 인권 및 정치 탄압과 살인 등을 자행하거나 부를 쌓아오던 비밀경찰 사바크의 고위 인사들과 옛 정제계의 인사들에게 집단린치와 보복을 가하거나 혁명 이후의 정치범 재판에서 몽땅 사형시켜 이란 자국내에서 철저히 몰살해버린 것을 생각하면 팔라비 2세의 우려는 결코 기우가 아니었다. 만일 팔라비 2세 황제가 해외로 도주하지 않고 이란 내에서 제위를 잡고 버티다가 혁명으로 몰락하여 붙잡혔다면, 혁명 후 주도권을 잡은 혁명 지도부 세력들이 제지도 하기 전에 당시 분노에 가득 찬 이란의 민중들이 팔라비를 잔혹하게 조리돌림하거나 끔찍하게 죽였을 공산이 크다. 설령 호메이니와 하메네이, 라프산자니 같은 당시 혁명 지도부 세력들이 팔라비에 대한 이란 국민들의 조리돌림과 즉결처분을 제지했다고 해도 어차피 혁명 지도부 세력들 역시 팔라비를 살려두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란 혁명 지도부들의 입장에서 정치범 재판에 올려 죽여야 할 1순위의 인물이 팔라비 2세와 파라 황후, 레자 팔라비 황태자, 파라나즈 팔라비 공주 등 그의 일가족들이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자신들과 대립해오던 적의 수장인 이상 더더욱 그랬다. 혁명 지도부에서 호메이니 등 이슬람 원리주의 파벌이 아닌 투데당이나 이란 자유운동 같은 공화주의파 파벌들이 주도권을 잡았다고 해도 이들 또한 팔라비 왕조에 대한 원한이 무척 컸기 때문에 좋은 꼴을 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동년(1978년) 이웃나라였던 [[아프가니스탄]]에서 군부 내 반란 세력들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모하마드 다우드 칸]] 전 대통령과 영부인, 자식들이 총살당했다는 소식이 팔라비에게 알려지자, 자기도 다우드 칸처럼 정권이 몰락하여 가족들과 함께 혁명 세력들한테 타살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더더욱 커졌고[* 1978년 다우드 칸 전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이 군사 쿠데타로 살해당했을 당시에 팔라비는 그저 이웃 타국에서 일어난 정변으로 취급했으나 같은 해 이란에서 혁명 분위기가 격화되어 왕정이 붕괴될 위기에 놓이자 자기도 다우드 칸 전 대통령처럼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초조함을 느끼게 되었다.], 더 이상 버틸 힘이 남아있지 않았던 팔라비 2세는 정권 유지를 포기하고 퇴위 밎 국외 망명을 고심하기 시작했다. 결국 [[1979년]] [[1월 16일]] 팔라비 2세는 샤푸르 바크티아르를 신임 총리로 임명한 다음 퇴위하였고, 퇴위한 이후에 이란을 떠나 미국, 파나마, 멕시코, 모로코 등 여러 국가들을 전전하다가 [[1980년]] 지병이던 암이 악화되어 마지막 망명국이던 [[이집트]]에서 사망했다. 팔라비 2세의 퇴위 이후 이라크와 프랑스 등 외국에서 망명하던 호메이니는 [[1979년]] [[2월 1일]]에 귀국하여 이슬람 혁명 위원회를 조직했다. 한편 팔라비 2세가 임명한 마지막 총리인 샤푸르 바크티야르는 호메이니와 차기 정부 구성과 정국안정을 위한 협상을 하려고 했지만 호메이니는 어떠한 협상도 거부하고 바크티야르의 무조건적인 사퇴와 정권 이양을 요구하며 바크티야르에게 맞섰다. 이러한 호메이니의 즉각적 사퇴에 반발하던 바크티야르 내각과, 왕실과 바크티야르 내각에게 충성과 지지를 맹세한 이란 육군 공수부대와 내무부 보안군이 호메이니 지지를 표명한 육군 내부의 반정부세력과 전투를 벌이다가 10일여간의 접전 끝에 호메이니가 바크티야르 총리와 친 팔라비 왕조파 세력들을 제압하고 주도권을 쥐게 되면서 [[2월 11일]] 팔라비 2세 전 이란 황제의 퇴위와 구 왕가의 해외 도주로 껍데기 밖에 남지 않았던 팔라비 왕조의 [[이란 제국]]은 완전히 무너지고 혁명이 성공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